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리 브란트 (문단 편집) === 퇴임 후 (사민당 총재, SI 의장) === 총리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사민당 총재 자리는 여전히 유지했다. 그는 무려 [[1987년]]까지 사민당 총재 자리에 있으면서 당과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임 총리인 헬무트 슈미트는 브란트나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달리 사민당 총재로 선출되지 못한 처지였다. 슈미트는 사민당 내에서 가장 우파[* 슈미트는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함부르크 시청의 경제 부처에서 주로 활동한 경제통이다. 이런 배경으로 슈미트는 사민당 소속이지만 경제 정책에서 특히 기민당에 가까운 자유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내에서 많은 견제와 비판을 받았다.]에 속했기에 총리 재임 기간 내내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 내 강성 주류의 심한 견제를 받았다. 70년대 이후 사민당은 브란트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주류에 68세대가 가세하며 강경파가 더 득세하게 되었고, 슈미트의 중도 내지는 (경제 정책 면에서) 때로는 우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행보에 지속적인 태클을 걸었지만, 슈미트는 훤칠한 외모와 탁월한 말솜씨, 친화력 있는 성격, 비교적 중도에 가까운 온건한 정책 성향으로 국민적 인기가 높았기에 사민당 주류는 슈미트를 내치지는 않고 정권 유지를 위한 일종의 얼굴 마담으로 그를 전면에 계속 내세웠다. 실제로 슈미트가 퇴임한 이후로도 브란트가 재도전에 나선다거나, 좌파 성향 후보가 전면으로 나오는 일 없이 당의 총리 후보는 주로 중도좌파 성향의 인물이 맡게 되었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무너지자, 브란트는 포르투갈 정치에 개입하여 포루투갈의 좌파 정당인 [[포르투갈 사회당|사회당]]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포르투갈에 좌파 사회당 정권이 집권하도록 노력했지만, 동시에 [[포르투갈 공산당]]에는 명백히 반대하며 포르투갈이 공산화되어 소련의 수족이 되는 것에는 반대했다. 1976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즉 국제 [[사민주의]] 정당 모임의 의장이 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죽을 때까지 종신으로 SI 의장직에 있었다. 국내에서 사민당 총재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국제적으로는 SI 의장 자격으로 각종 국제 회의에 참석하거나 해외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10월 유신]] 독재를 비판한 [[통일사회당(1961년)|통일사회당]]의 [[김철(1926)|김철]] 당수와도 인연이 있어서, [[사회당(프랑스)|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김철을 지원했다고 한다. [[도쿄]]에서의 SI 대회에서는 김철의 귀국을 위해 [[일본사회당(1945년)|일본사회당]] 의원들을 대동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http://blog.daum.net/peoplespresident/7366988|#]] [[김대중]] 일본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김대중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고, [[1987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것을 주도했다. 이후 김대중은 매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꾸준히 올랐고, 마침내 [[2000년]]에 수상했다. 1987년 건강이 크게 쇠약해졌던 그는 장기집권하던 사회민주당 대표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나 명예대표직에 취임했다. 퇴임한 직후 자서전을 집필을 시작했고 세번째 아내와 주로 여행을 다니는 등 신변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external/www.willy-brandt.org/csm_WillyBrandt_Leipzig_1990_33049892e4.jpg|width=100%]]}}} ||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자, 서독 내 좌파 인사들 가운데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2국 연방제' 혹은 과도 정부 구성이 아닌 '신속한 재통일'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듬해 3월에는 동독을 직접 방문하여, 동독 정부 하에서 실시된 최초이자 유일의 자유 총선을 위한 공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해 [[10월 3일]]의 [[독일 재통일]] 선포식에 독일의 여러 정치인들과 함께 참석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의 일화인데, 당시 그는 방한중이었다.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와의 면담에서 김대중이 언제 독일이 통일되겠냐고 묻자 '''"먼 훗날"''' 이라고 답했는데, 몇시간 후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독일로 귀국했다고 한다. 1992년 10월 8일, 라인강변의 운켈 자택에서 지병인 [[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78세.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베를린]]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